"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은 현실 자체보다 기대와 현실 사이에 벌어진 거리인지도 모릅니다."
원하던 대학에 붙었는데도, 어렵게 취업했는데도, 승진을 했는데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 순간이 있습니다. 분명 잘 해내고 있는데 스스로는 늘 부족하다고 느끼고, 하나를 이루면 곧바로 다음 목표가 눈앞에 놓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대개 현실을 탓하지만, 정작 마음을 지치게 하는 것은 현실보다 앞서 달려간 '기대'일 때가 많습니다.
이번 글은 장정은 센터장님께서 작성해 주셨습니다. 상담 현장에서 만난 직장인·부모·청년의 이야기를 통해, 기대와 현실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조율할 수 있는지 짚어주셨습니다.
기대를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기대가 지금의 나에게 힘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나를 계속 몰아붙이고 있는지를 함께 들여다봅니다.
기대와 현실 사이, 마음이 지치는 이유
우리는 누구나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삶, 조금 더 편안한 마음, 조금 더 행복한 나를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기대했던 삶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생각보다 멀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쉽지가 않네요. 내가 능력이 부족한 걸까요?”
“열심히 살았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요?”
“대학만 가면, 취업만 하면, 승진만 하면 편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상담실에서 종종 듣는 이야기입니다.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지만 마음 한편이 허전하고, 어렵게 취업했는데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결혼하면 외롭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갈등은 계속되고, 아이를 낳으면 행복이 가득할 것 같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피로와 죄책감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어렵게 승진한 뒤에는 기쁨보다 “이제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커져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원하던 것을 얻었는데도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현실이 힘들어서 괴롭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실의 어려움은 분명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하지만 상담을 하다 보면 현실만큼이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이래야 한다’는 기대입니다. 기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기대가 있기에 공부를 시작하고, 새로운 일을 배우고, 사랑하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기대가 현실보다 지나치게 앞서가기 시작할 때입니다. 현실은 한 걸음씩 나아가는데 마음속 기준은 계속 앞에 놓입니다. 하나의 목표를 이루면 잠시 안도하다가 곧 다음 목표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의 삶에 도착하기도 전에 또 다른 곳을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은 현실 자체보다 기대와 현실 사이에 벌어진 거리인지도 모릅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기대를 만들어 내는 시대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기대를 만들어 내기 쉬운 시대입니다. SNS를 열면 누군가의 합격 소식이 보이고, 누군가는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 해외여행을 떠나고, 행복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을 올립니다. 화면에는 대개 그 사람의 일상 중 가장 좋은 순간이 담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장면을 보면서 그것이 그 사람의 평범한 하루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비교가 시작됩니다. ‘내 또래 사람들은 잘사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럴까.’, ‘나도 조금만 더 노력하면 저렇게 될 수 있겠지.’, ‘나도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처음에는 이런 비교가 동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비교가 습관이 될 때입니다. 남의 삶을 기준으로 내 삶을 평가하기 시작하면 지금 내가 가진 것은 좀처럼 충분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나를 이루면 또 다른 기준이 생깁니다. 취업하면 승진을 생각하고, 승진하면 더 높은 자리를 생각합니다. 집을 마련하면 더 좋은 집을 생각하고, 아이가 잘 자라고 있어도 다른 아이와 비교하며 부족한 부분을 찾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 순간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보다 ‘앞으로 무엇을 더 이루어야 하는가’를 더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기대가 삶을 이끄는 힘이 아니라 나를 계속 몰아붙이는 힘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잘하고 있는데도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
상담을 하다 보면 현실에서는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도 자신을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한 직장인은 업무를 성실하게 해왔고 주변에서도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담실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잘하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이유를 물어보니 회의에서 자신이 했던 말 한마디가 계속 마음에 걸린다고 했습니다. 보고서를 제출하고 나서도 “조금 더 잘 쓸 수 있었는데”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아도 기쁘기보다는 ‘그래도 부족했던 부분이 있었는데’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이런 경우를 흔히 완벽주의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완벽주의는 단순히 높은 목표를 갖는 것과는 다릅니다. 높은 목표는 성장의 힘이 될 수 있지만, 완벽주의는 작은 실수나 부족함을 자신의 가치와 연결하기 쉽습니다. ‘잘했다’보다 ‘더 잘했어야 했다’가 먼저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취를 이루어도 충분히 기뻐하기 어렵습니다. 한 가지 일을 잘 끝내면 그것은 성취로 남기보다 다음에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이어집니다.
상담에서 이런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는 때때로 이렇게 말씀드리게 됩니다.
“능력이 부족해서 힘든 것이라기보다, 너무 오랫동안 높은 기준을 감당해 와서 지친 것은 아닐까요?”
그 말을 듣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눈시울을 붉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동안 자신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더 잘해야 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 것 자체가 낯설기도 합니다.
사랑에서 시작된 기대가 관계를 힘들게 할 때
기대는 나 자신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우리는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부모라면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고 자신의 가능성을 마음껏 펼치며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 자체는 자연스럽고 소중합니다. 하지만 부모의 기대가 아이의 현재보다 앞서가기 시작하면 관계가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중학생 자녀를 둔 한 어머니가 상담 중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아이를 사랑해서 그러는 건데 왜 자꾸 다투게 될까요? 학원도 보내고 옆에서 도와주고 최선을 다하는데, 아이는 저를 피하려고만 해요.”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머니에게는 ‘성적이 조금만 오르면 아이도 자신감을 찾고 더 편안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실제로 힘들어하고 있던 것은 성적만이 아니었습니다. 친구 관계에 대한 불안도 있었고, 부모의 기대를 실망시킬까 봐 느끼는 부담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 도와주고 있었지만, 아이에게는 그 마음이 때로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전달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담에서는 부모에게 아이의 성적이나 결과를 묻기 전에 아이의 마음을 묻는 말을 늘려보도록 권하기도 합니다. “오늘 학교에서 힘든 일은 없었니?”, “요즘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엄마는 궁금해.” 이런 질문이 당장 갈등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부모가 나의 결과뿐 아니라 나의 마음에도 관심이 있구나’라는 경험을 줄 수 있습니다.
기대는 사랑에서 시작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기대가 상대의 현재 모습을 보지 못하게 만들면 사랑을 전하려던 마음이 어느새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말로 바뀔 수 있습니다. 아이를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큰 기대를 갖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지금의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아이의 속도를 기다려 주는 것이 믿음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기대는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지만, 어느 순간 지금의 나와 상대를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기대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지금 나와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입니다.
때로는 더 잘해야 한다는 마음보다, 지금의 나와 상대가 어떤 상태인지 먼저 바라보는 것에서 변화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2편에서는 가까운 관계에서 기대가 어떻게 커지고, 그 기대를 어떻게 조율할 수 있을지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